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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부정공>영귀당공휘태망문적수습기(咏歸堂公諱泰望文蹟收拾記)
咏歸堂公諱泰望文蹟收拾記 盖先祖有美行而爲后孫者不能繼述將歸泯湮則是可曰爲先之道乎先祖無懿德而爲來裔者妄增浮衍便成別人則亦豈爲彰先之孝哉七世祖咏歸堂公幸生三灘公觀水公之後能承祖業實有美行懿德而鄉里稱以孝子士林號以處士當世文集及鄉道之狀不爲不多而藏於宗家矣累經回祿一無有焉故去甲戌春先君以觀水亭咏歸堂及祖考三公褒揚之意與一門爛議未就而乙亥秋下世倍切痛恨丙戌堂叔公又以疾不起乃探篋笥故紙得略干字相好亭勉戒文書室刱建文是咏歸堂公所述孝行錄參判素庵公所撰墓碣銘監役道溪公所撰祭文傍先諱鼎字命所作家狀進士公所述戊子得遺稿一卷於再從弟基永家非但當時諸君子之酬唱三父子之相和不下於嵋山之蘇家河南之程門也家有家禮剳疑下巻而恨未得全秩矣壬辰又得上卷與所解喪禮備要於基永家手澤尚新嗚呼惜哉己亥偶得江南樂府於月坪族人家公平日言行益爲昭著庚子又得吊客錄於基永家京鄉士族之名啣載在丙辰又得絶韻二首於許永先集中有鰲川韓先生和詩萃成遺集二卷以見一國之賢士大夫而得堂韻及記銘豈敢以巧言麗詞強加采飾以取譏笑哉使此文蹟以俟立言之君子讎校入刊不至泯湮之歸則或近乎爲先之道耶以是明言之 十世孫 學洙 謹識 영귀당공휘태망문적수습기(咏歸堂公諱泰望文蹟收拾記) 대개 선조가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데도 후손 된 자가 이를 계술하지 못하고 민몰하게 한다면 어찌 선조를 위한 도리라 하겠으며, 선조가 아름다운 덕이 없는데 후예 된 자 망령되게 뜬 말을 보태어 문득 별사람을 만들면 어찌 선조를 빛낸 효도라 하겠는가. 七세조 영귀당공(咏歸堂公)이 다행히 삼탄공과 관수공의 뒤에 나서 조업(祖業)을 이어 아름다운 행실과 큰 덕이 있어 온 고을에서 효자라 일컬으며 사림이 처사라고 불러 당시의 문집 및 향도의 천장이 많아 종가에 장치하여 두었는데 여러 차례 화재를 만나 모조리 타 버렸다. 지난 갑술년 봄에 선군(先君)이 관수정 영귀당 및 조고 세 공을 포양할 뜻으로 종족과 의논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을해년 가을에 세상을 떠나시니 슬픔이 배나 더하고 병술년에 당숙공이 또 병환으로 별세하심으로 이에 책롱을 찾아 고지(故紙) 약간 자와 「상호정면계문(相好亭勉戒文)」·「서실창건문(書室刱建文)·「효행록(孝行錄)」 등은 영귀당공의 소술이고 참판 소암공(素庵公) 소찬묘갈명 감역도계공(監役道溪公) 소찬제문 방선정명(傍先鼎明) 소작가장을 얻고 「진사공소술무자득유고(進士公所述戊子得遺槁)」 一권을 재종제 기영(基永)의 집에서 찾으니 다만 당시 모든 군자의 수창일 뿐 아니라 세 부자의 회답은 미산(嵋山)의 소동파(蘇東坡)집과 하남(河南)의 정명도(程明道) 집보다 못한 면이 없었다. 집에 「가례답의(家禮剳疑)」 하권이 있어 전질을 못 얻은 것을 한하였더니 임진년에 또 상권과 주해한 「상례비요」를 기영의 집에서 찾으니 공이 남긴 흔적이 아직도 새롭다. 아! 아깝도다. 기해년에 우연히 「강남악부(江南樂府)」를 월평(月坪)의 친척집에서 얻으니 공의 평생 언행이 더욱 밝게 나타나고 경자년에 또 「조객록(吊客錄)」을 기영의 집에서 찾으니 경향 사족의 명함이 실려 있고 병진년에 또 「절운두수」를 허영선(許永先) 문집 중에서 찾아 오천(鰲川) 한 선생 시와 합하야 유집 두 권을 만드니 한 나라의 어진 사대부에게 당운과 기명을 얻었다. 어찌 감히 공교한 말과 고운 글로 억지 채식을 하여 기롱의 웃음을 취하겠는가. 이 문적을 입 언 군자의 교정을 얻어 발간하고 산일되지 않으면 선영을 위한 도리에 가까울런지… 七세손 학수 삼가 기록함(七世孫學洙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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